“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3)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진심으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자비의 특별희년” 기간 중 맞이하는 이번 부활은 어느 해보다 풍성한 은총이 함께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죄를 뉘우치는 사순시기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느님은 징벌하시고 죄 값대로 갚으시며 우리도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선포하며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부활은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온전히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과 축하의 인사가 불편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암울하고 참담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개성과 건전한 자아정체성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공부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어린 학생들과 미래를 향한 꿈을 제대로 품어 보지 못하는 많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줄어드는 고용의 기회와 노년의 불안감이 모두에게 밀려옵니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은 단순히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큰 문제입니다.

이런 긴박한 현실에서 점차 증가하는 갈등과 폭력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인간에 대한 불신을 증폭하며 물질적 성공이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인사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희망 없이 두려움으로 가득찬 우리 삶에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죄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제 죄의 뿌리를 차분히 살펴봅시다. 거기에는 현대인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물질로 허기를 채우려는 영적 배고픔이 있습니다.

사랑을 확인하려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영적 허기를 권력과 물질이라는 옷으로, 외적 아름다움과 쾌락이라는 잠깐의 뜨거운 손난로로 넘겨본들 추위는 더 강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눈앞에 있는 이웃과 형제도 경쟁자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고통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대양을 떠다니는 난파선과 같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현대적 위기에 대응하여,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와 ‘자비의 얼굴’ 등을 반포하는 것도 시대가 보여주는 공멸의 위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잘못된 가치관으로부터 기인하는 개인과 사회의 고통,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 감각과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을 신비적이고 강렬한 체험 안에서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일상의 순간에 우리를 신비로 초대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의 불안과 외로움을 치유하려는 손을 내미십니다. 이 신비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담겨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삶의 의미를 묻고 하느님을 찾도록 이끕니다. 신비이신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최고 절정의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가장 근원적인 죽음의 두려움과 허망함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의 고통도 견디어 내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시며 자비로이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의 사랑에 무관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타난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0,9) 시몬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하고 대답하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 그조차도 빈 무덤에서 부활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사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까지 막아주는 방패이며, 존재의 의미를 정초하는 기반이며, 내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는 자비의 샘물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보지 않고 부활 체험의 지평에서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못 박는 유다인의 우를 범하게 됩니다.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자신들이 믿는 구세주의 도래를 위해 열성을 다해 싸웠던 그들은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을 정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임을 알려주며,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든 순간이 은총임을 알려주고 있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맞서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에 맞서 타인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의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소비주의에 맞서 검소함을, 지배와 소유의 문화에 맞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순교는 ‘증거하다’는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증거하는 이러한 모습 안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 비칠 것입니다. 세상의 긴장과 적대감이 사그라들고 불감증의 세계화는 나눔과 섬김의 바람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과 활동은 한번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활동과 사목 안에 녹아들어 지속적으로 증거함으로써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의 모습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이번 시노드를 통해, 어두운 시대에 “어떻게 대전교구가 순교 정신을 본받아 하느님 사랑이 현존하심을 증거하는 사목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합시다.

성령의 활동 안에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며 우리의 아름다운 몸짓이 교회의 등불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걸어갑시다.

아울러 다가오는 선거일에 우리 국민이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자비로운 정치인을 알아보고 투표하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시다. 참된 민주주의는 성숙한 국민의 책임의식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며, 신앙인의 정치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입니다.(「복음의 기쁨」 220항 참조)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좌우되기보다는 봉사의 정신으로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덕목을 갖춘 정직한 일꾼을 선출합시다.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주시는 성령께서 세계무대로부터 점차 고립되며 긴장과 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도자들과 함께하시어,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가 하루 빨리 정착되기를 순교 선열들과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함께 전구합시다.

한반도가 평화의 표징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교류하며 협력하길 바랍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차원의 교류와 협력은 재개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통일은 평화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2016년 3월 27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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