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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로 떠난 안보 여행기
최주철 기자 | 승인 2019.06.21 10:54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필자등 36명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떠났다. 2019년 6월 12일부터 15일까지 3박 4일 일정이다. 하남시 시청에서 분주하게 대형버스에 탑승하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각자 여권 등, 수화물과 기내 휴대가능 물품을 확인하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시간 남짓해서 기내 창밖에 드넓은 초원이 보였다. 그리고 하바롭스크 공항에 도착했다. 준비된 버스를 타고 레린 광장으로 달렸다.

버스내에서 현지 가이드로부터 하바롭스크 소개를 받는데, 하바롭스크는 지방의 행정·산업·교통의 중심지이자 극동지방 최대의 도시이고, 이곳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고 한다. 레린 광장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은 러시아에 날로 군사 퍼레이드와 군 장비 전시회가 열렸다. 24인용으로 보이는 천막이 설치되었고 러시아 군 피엑스가 있었다. 나는 군 출신이라 관심있어서 사진도 찍고 잠시 함께 했다.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병사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레닌 광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계자. 러시아 공산당과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창설자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Lenin', Vladimir Il'Ich)의 동상이 있는 레닌 광장은 하바롭스크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축제일이 되면 각종 행사가 열리는 이곳은 여름과 겨울의 풍경이 아름다워 시민의대표적인 휴식처 역할을 하고 관광객에게도 매우 인기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일행은 어둠이 올 때 쯤 인근 식당에서 러시아 전통 보드카와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베르바호텔로 이동했다. 로베에서 여권을 맡기고 객실 키를 받아서 침대로 향했다. 그러나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시 한곳으로 끼리끼리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들었다.

그곳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늦은 아침에 산책을 즐겼다.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과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 이른 아침 아이를 차에 태워 가는 아빠, 바쁜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에 출근길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시골스러운 나무와 풀 그리고 나팔꽂까지 너무 정겨운 식물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호텔에서 여유롭게 호텔 식당 창가에 앉아 아침식사를 즐겼다. 유럽풍에 식사와 커피 한잔으로 즐겼다. 그리고 우리는 시내 곳곳을 둘러보기 위해 떠 났다.

아무르강 앞에 위치해있는 꼼소몰스끼야 광장 및 성모승천사원과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무라비요프 아무르스끼 동상에서 잠시 머물렀다. 위풍 당당한 동상앞에서 다양한 포즈로 기념촬영을 했다. 아무르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우초스 전망대 앞에서 강너머 초원과 드넓은 강이 답답했던 가슴을 뚫어 주었다. 해변같은 강가와 산책로 그리고 흙빛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극동지역 역사자료등이 전시되어 있는 향토박물관에는 그들의 생활과 소련에 영광을 그리워하는 유물들이 가득했다. 특히 눈에 익은 따발총과 러시아식 장총은 6.25때 북한군에 개인화기 였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호랑이 박제와 각종 동물을 실물같이 관리해서 전시 했다. 일행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관람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지인의생활방식을 알 수 있는 중앙재래시장에서는 서민들에 생활은 어느 곳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고려인이라고 소개하는 여인에게서 장미꽃 2송이를 사서 애써 미소짓는 주변 상인들과 정감을 나누며 보냈다. 다음은 아시아에서 세 번째 규모 동방 정교회 구세주 성당과 무명용사의 비 및 꺼지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을 관람했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로 러시아, 발칸반도, 서아시아 지역 등에 분포한 그리스도교의 3대 분파 중 하나인데 프레오브 라줸스크 대성당은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18세기 표트르 1세부터 소비에트 연방시대까지 계속되는 박해를 받았으나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서서히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에 들어갈 때 손을 뒤로하여 뒷짐을 지는 행위는 금물이다. 이는 구소련 시절 KGB첩보원이 하고 다니던 나쁜 버릇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색한 예의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경건하게 둘러보고 기도를 했다. 각자에 만복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여기 꼼소물스크 광장은 바둑판처럼 잘 정비된 하바롭스크 시의 중심이다. 밤이면 신비로운 불빛을 밝히는 광장 분수대 주변에 매년 축제와 행사가 이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주변에 많은 사원이 있어서 사원 광장이라고도 불렀으나 1930년에 사원이 많이 허물어졌다. 우즈 뺀스키 사원으로도 불리는 성모승천사원 또한 1917년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2001년 원래 자리에 다시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이렇게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고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 했다. 약 11시간 30분정도 소요되었다. 4인1실에 좁은 공간은 우리에게 또 다른 추억을 주었다. 객실은 1실내에서 1층과 2층 침대로 나누어진다. 따뜻한 커피와 컵라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재미가 좋았다. 그리고 열차 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초원은 부럽기 까지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새벽녁에 도착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일행은 기차역 대합실에서 연해주로 갈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우리는 바둑판과 같이 잘 발달된 도로를 약 1시간 30분을 달렸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선생 유허지와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 고려인 문화센터 및 안중근 의사 기념비 와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마지막 거주지도 견학하기로 했다. 최재형 선생 생가와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장소에서 잠시 그들에 애국충정을 생각했다. 항일 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해 정착한 선조들에 삶과 애환이 있는 마을과 박물관에서 우리는 국가가 있는한 안보가 있다는 구호와 그들에 희생에 보답하고자 평화와 자유대한민국 수호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렸다. 졸음을 참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고구려와 발해에 기상, 그리고 분단된 조국, 타국에서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연해주 고려인들, 임중도원이 였다.피곤하고 지치 피로를 풀기 위해 특별히 러시아의 전통 사우나인 반야를 즐겼다.

시원하고 개운한 몸으로 우리는 현지인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듣고 있었다.

신한촌은 1863년 이후 연해 지방에 들어온 한인들이 라게르 산비탈지 부근에 모여살면서 건설되었다. 디나모 스타디움 부근의 구한촌과 함께, 1937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한인들의 양대 거주지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하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했다. 소련혁명 직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 신한촌에는 비밀아지트와 빨치산부대의 무기창고들이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현대식 건물과 문화회관이 세워졌으며, 1932년에 한국극장이 개관되는 등 한인 거주 지역으로서 체계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신한촌은 해체되었다. 1999년 8월 15일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한민족연구소가 ‘신한촌 기념비'를건립했다. 이 기념비는 연해 지방 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재러시아 한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독립문은 1920년 3ㆍ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한인들이 신한촌에 세운문이다. 당시 마을 입구에 독립기념일인 3.1문을 지나서 메인 스트리트로 바로 걸어가면 우측에 소학교가 있었으며, 맞은 편은 지금 구매조합의 사무실로 쓰여지고 있으나 이전까지 한국인 소학교였다.

그곳은 1919년의 간섭(서백리아 출병)당시에 독립운동을 모의한 곳이라 하여 일본군인들이 불살라 버린 것을 재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독립문은 없어지고 그곳에 나무만이 서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했던 선생은 25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결연히 맞서 이를 철회시키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소투쟁을 펼쳤다.

이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운동을 하던 중 1916면부터 병석에 눕게 되고 조국광복을 이루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17년 3월24일 48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된다.

선생의 유해는 화장되어 아무르강에 뿌려졌으며, 후에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웠다.

최재형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항일 운동을 위해 사용하며 안중근 의사를 돕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한국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하던 최재형도 그를 간첩으로 몬 일본의 음모로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 되었으나, 러시아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상거래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최재형은 한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러시아에서 일본인에 의해 총살당하고 만다.

다음은 발해성터로 우수리스크시는 1966년에 러시아 이주자들에 의해 형성된 니꼴스꼬예 마을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은 인구가 20만 명이 안 되는 도시이다.

이곳에는 1만 년 내지 1만 5천 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고, 발해 때부터는 역대 왕조의 중요 행정구역의 하나였으며, 러시아인들이 들어올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고려인을 껴안고, 독립운동의 산실인 연해주의 의미를 간직하여 민족정체성을 회복하는 역사적 사업으로 2004년 기획되어 2010년 준공되었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고려인 뿐만 아니라 러시아 모든 민족들과 함께 사회, 문화, 복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받는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에 의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병원, 학교, 한글교실, 도서실, 멀티미디어실, 이주역사관, 다목적 공연장, 사무실, 회의실 등이 있다. 지난 러시아 푸틴 대통령 집권후 눈 부시게 성장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란 동바을 지배하라 라는 뜻으로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소령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며,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항만은 표트르 대제만에서 남쪽으로 돌출한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 끝에 위치하며, 시가는 해안에서부터 구릉 위로 펼쳐져 있다. 1860년 7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해군항으로 지정되면서 도시 건설이 시작되었다. 1870년에 시로 승격된 후, 1890년대에서 1900년대에는 러시아 극동 지구의 대외 교역, 괴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1904년에는 러시아 극동지구의 자유무역 항구로 지정되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군함과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볼 때 이들에게도 우국충정에 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일행과 옛 소련 잠수함내에서 기념촬영하며 즐거워 하는 일행들과 마지막으로 기념품 상가에 들러 각자 조금만 선물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해 줄 준비를 했다. 특히 이곳은 1917년 시인구가 13만 audd을 돌파하면서 ‘극동의 세인트 피터즈버그(St. Petersburg)'라는 별칭을 얻었다. 1917년까지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벨기에, 터키, 그리스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영사관을개설하였으며, 1992년 1월 1일부터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는 국제 도시로 급격히 부상 했다.

일행은 금각만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독수리 전망대와 러시아혁명을 기념하여 만든 혁명광장 그리고 개선문을 견학했다. 일행은 마지막 저녁으로 러시아 전통 음식인 샤슬릭으로 했다. 물론 입맛에 맞지 않는 분들은 고추장과 기타 한국반찬이 함께 했다. 즐거운 식사였다.

일행은 여기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많은 것을 일깨워 준 역사적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탑승 했다.

최주철 기자  Sync29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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