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심포지엄 주제발표 요약 내용-

(사진/포스터)

[pic종합뉴스·국제전문기자클럽/김용식 기자]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광복 71주년 및 일제의 동북침략(9․18) 85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중국 심양 9․18역사박물관 현지에서 국제교류전 및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하여 국제교류전으로는 먼저 9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한인 항일투쟁’을 주제로 개최되며 또한 중국 심양 에서는 9․18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한다.

또 한편으로는 국제학술심포지엄(Interntaional Symposium)에서 ▲김형목(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위만주국(僞滿洲國)’ 시기 일제의 재만조선인 교육정책과 현황」에서 조선인 교육문제는 복잡한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일제는 조선인 ‘이중국적’ 문제를 대륙침략의 첨병으로 활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시동인(一視同人)이나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가면으로 위장된 동화주의는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였다.고 밝이고…

이는 재만조선인 교육문제에 그대로 투영․시행되었다. 침략 첨병으로서 역할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외형과 달리 동화주의에 입각한 교육정책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며” 조국광복을 향한 한중 연대에 의한 항일투쟁은 이를 반증한다. 물론 이전 민족교육과 같은 궤도에서 일정하게 벗어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 양지선(단국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만몽침략정책과 한중혁명세력의 인식」에서 만몽정책에 대한 한․중 양국의 시각은 공통적인 면도 있었으나, 인식의 방법과 심도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주 한인들은 만몽개척이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던 경제조건의 개선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과 중국으로 이주해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그 이면의 침략의도를 주목하고, 중국과 연대해 일본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독립을 촉진시키고자 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산동출병과 제남사건 등을 통해 만몽정책의 침략성을 확신했다. 이를 계기로 관내지역 한인들과 연대해 일본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만몽지역에서는 한인들을 일본 만몽침략의 선구자로 인식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축이 발생했다. 토지 상조권을 두고 실제 한인들과 마찰이 빈번히 빚어졌기 때문에, 한인의 이주를 만몽정책과 동일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이 똑같이 만몽정책이라 불리는 대화침략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각자 입장과 지역별 차이로 한․중의 인식 차이는 매우 컸다. 이 같은 모순들은 한․중 양국 간 연대관계의 형성을 저해하였다. 결국 이는 일본이 침략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말했다.

▲ 고영량(중국공산당 반석시 당사연구실) 특별연구원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한 동북 첫 항일무장-반석적색유격대-」에서 한인유격대 반석적색유격대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에서 활동했던 동북지역 최초의 무장조직임을 논증했다.

그동안 중국 동북지역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인물과 한인유격대, 한중연대와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다수의 방증자료와 회고록 등을 이용하여 李紅光등 7명의 韓人 청년으로 구성된 반석적색유격대가 1931년 일제의 동북침략(9․18) 이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최초의 무장조직임을 주장하였다.

▲ 김주용(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은 「9․18과 ‘한국독립군’의 무장투쟁」에서 기존 중국 학자들이 소홀히 했던 1931년 9월 18일 일제의 본격적 동북침략 이후 한국독립군들의 활동상을 재조명하였다.

이는 지청천 장군이 이끈 한국독립군과 중국의 정초, 이두 부대의 연합작전을 사실상 중국 당국에서도 사실상 인정하였으며, 1933년 이른바 동녕현 삼차구 전투 역시 한국독립군 부대와 중국 길림구국군과의 연합작전의 성과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으로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일제의 정예사단과 전면전을 펼쳐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한중 공동항일투쟁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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